정조대왕 능행차연시 구경하기
요새 드라마 이산이 화제다. 그이산은 정조의 어릴때 이름이다.
수원에 있으면서 정조의 능행차를 한번도 구경 하지 못했던 나는
그림으로 나 보던 정조의 능 행차가 있던날 그러니까
제44회 수원화성문화제의 마지막날 토요일 마침 행사가 열리는
도로에 있다가 느닷없이 구경하게 되었다.
수원화성문화제에서는 조선조 22대 정조대왕 친림 재연, 과거시험 시연과
무예 24기 공연이 펼쳐지는 수원지역 대표문화축제 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대권후보들이 세종의 수성리더싶을 연구 하고 있다고
한다.. 정조도 세종대왕을 모델로 혁신을 꿈꾸었던 임금이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정치적 죽음으로 천신만고끝에 임금에 오른지라
나름의 효를 실행하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행차라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매년 개최 하였다.
수원종합운동장에서의 행사 대기 중인모습
혜경궁홍씨 가마
뒷모습이 영화에서나 보았던 의상이다.
행차가 시연되고 있다. 맨선두에 만장과 농악대가 출발한다.
옛날 정조능 행차 때는 이보다 더욱 화려 했을 것이다.
정조의 호위 군관들이다.
현대와 과거가 어우러지는 듯한 모습이다.
제법 장수의 모습을 느껴본다.
드디어 정조대왕 화산능 행차라는 깃발을 필두로 정조가 행렬하고 있다.
혜경궁 홍씨 정조 어머니 의 어가 행렬이다.
정조 임금도 복장은 장수 복장이다.
길거리 흥을 돋구기 위한 키다리 들이 눈길을 끈다.
장안문의 메인 무대에서 외국초청인사들과 방문객들이 정조능 행차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장안문 안으로 정조 대왕이 들어가고 있다.
정조대왕능 행차는 210여년전 조선조 제 22대 정조대왕께서 부왕
사도세자의 원침참배를 위하여 행차하던 모습을 재연하는 행사로
수천명의 장엄한 행렬은 참가자는 물론 관람자 까지 효를 되새기게
하여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최대의 가두 전통 퍼레이드로 2000명의 출연인원과 장비
의상 소품이 국내외 방문객에게 기억되고 세계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축제 행사이고 3000명의 기업체 단체 외국인이
함께 참여하는 자율퍼레이드로 발전하고 있는 수원의 대표적인
문화축제이다.
정조 어머니 가마 행렬이 장안문으로 들어서고 있다.
호위군사들이 장안문 으로 들어서고 있다 행사도중 말못하는 말들이라
길가에 용변을 하는 웃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길가에 오줌을 깔기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크게 웃기도 한다.
행차가 지나가는 도로는 완전 교통이 통제된다.
각기업체 단체 등이 나름의 퍼포먼스 를 하고 있다.
행차뒤를 이어 외국인 초청객들이 청용열차 같은 것을 타고 뒤를 잇고
있다.
해병의장대의 사열
기업홍보 마케팅 수단의 일환으로 각기 마켓팅 활동을 하고 있다.
수원을 대표하는 삼성전자
여고생 관악퍼레이드
째즈등 각 단체 동아리들의 거리 공연
일본 여성들이 주축이된 퍼레이드
태국퍼레이드 모습
늘씬한 차량들을 이용해 홍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비행기 까지 동원 한 모습
빕스 차량
아웃백 차량
브라질의 삼바 공연단 까지 동원된다.
브라질의 삼바 공연팀 관능적인 몸짓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한 언니는 신이 난듯 아찔한 포즈를 취하며 즐기고 있다.
국군 의장대 공연
삼성전자의 모습
디지털인간이라는 표현으로 신기한 복장을 하고 있다.
정조의 과거 시험
과거시험장 재현모습
정조의 초상화
요즘 드라마 이산이 인기리에 방송 중이다.
정조의 집권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조의 개혁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대부분 긍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지나치게 신중해서 과감한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부터, 처음부터 개혁은 한계를 갖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지나치게 왕권강화에 집착한
나머지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혁은 미완성인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에 따른 역풍은 개혁을 하지 않은 편이
나았을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고 잠시 후퇴도 있다.
200여 년의 역사 흐름 속에 그의 개혁의지는 살아 꿈틀대고 있다.
정조가 집권할 당시 누구도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아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물론 홍국영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 주긴 했어도 개혁을 실행에 옮길 만한 힘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그러면서도 꾸준히
추진한 것이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기 위한 주체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민심을 끌어들여 백성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중요성이나 시간상으로 우선순위가
있다기보다는 동시적으로 실행된 것이고 민심을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개혁 정책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주체세력의 양성은 규장각의 건립과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장용영의 설치로 나타난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권력 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세력은 정조를 두려운 존재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집권 초기에 정조에 대한 세 차례에 걸친 암살시도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암살 방법이 노골적이고
은밀하지도 않아 왕에게 대놓고 대드는 형국이었다.
정조는 자기 세력을 키우는 한편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정조가 집권하자마자 자기세력을 만들고 왕권강화를 위한 일에
착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규장각은 이러한 생각이 집약되어
건립된 것이다.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조의 인물을 길러내며
개혁을 착수하기 위한 혁신정치의 중추기관이었다.
규장각 운영체제에서 개혁적인 면이 엿보인다. 젊고 당색에
자유로운 인물과 서자 출신의 똑똑한 인물들이 등용되었다
. 특히 정조 말년까지 138명이 배출된 중견 관료인 초계문신은
정조의 개혁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데 이가환,
서유구, 정약용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규장각 건립과 함께 친위부대인 장용영 설치를 추진하였다.
정조 실록에 따르면 장용영 설치를 두고 "호위를 하려는 것도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될 날이 올 것이다"라 하였다. 왕권 강화와 개혁
정치로 내몰린 기득권 층의 반발과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친위부대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세력을 길러내는 노력과 함께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개혁적 성향을 가진 인물 혹은 자신의
측근을 적극적으로 지방관으로 내보내 지방 사대부를 견제하는
한편 백성의 고통을 풀어주려 하였다. 다시 자신이 키운 인물을
중심으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수령을 감시, 감독하게
하였다. 수령과 암행어사를 동시에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
왕권을 강화해 나아가는 한편 백성에 다가서려 하였다.
또한 수령과 암행어사의 주요 일 중의 하나가 백성의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행찻길이나 능행길에서 백성의 소리를
직집 들으려 하는 등 백성과의 언로를 다방면으로 열어 놓았다.
서얼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고 노비가 도망가더라도 다시
잡아들이는 노비추세법을 폐지하는 한편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중소 상인과 영세 자영업자의 자생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해통공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런 일련의 정책은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상인 등 중인의 세력이 커지는
신분 변화에 따른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통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권이 안정되어갈 즈음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표명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하나는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
가고 결국 정치적 공간의 이전까지 꾀하는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건립하는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묘호를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바꾸고 존호를
장헌이라 추상하는 등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근본적으로 효행의 일환이라 하지만 기저에는 역적으로 몰린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묘를 화성으로 옮기면서 묘호를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꾸고
곧 이어 능호를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정조는 한해에 몇 차례씩
능행길에 올라 자신의 효심을 대외에 드러내는 한편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정치를 한다.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음으로써 민심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이었다.
가장 대규모로 기획된 능행은 1795년 윤2월9일부터 17일까지 8일
동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거행되었다. 명분은
회갑연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정통성을 확보하고 수원화성에 대한 위용을 드러내
새로운 정치적 공간, 즉 개혁을 추진하는 개혁적 공간임을 암시하여
개혁의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사도세자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여 결국 죽음으로 몰아간 김상로의
묘가 과천에 있다 하여 정조는 과천 길을 피하고 안양, 수원 길을
능행길로 잡는다. 지금 이 길은 너무나도 큰 길이 뚫려 예전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데 정조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안양의 만안교는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홍예교이다. 정조의 융릉 참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지금은 실생활에 이용되는 아름다운 다리다. 몇 년 전에
쓰여진 책을 보면 만안교 밑으로 흐르는 물이 더럽고
탁하다 하였지만 지금은 비교적 깨끗한 물이 흘러 기분을 좋게 한다.
의왕에서 수원으로 가자면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이 고개를 지지대
고개로 부른다. 큰 길 옆 언덕엔 정조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지지대비가 남아 있다. 지지대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
\'지지오행야(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참배를
하러 가는 길이 더디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 지지대 고개에 세워진 지지대비, 길 건너편에 효행기념관이
세워지고 이 고개 밑으로 노송지대가 자리하고 있어 정조의 자취를
느껴 볼 수 있다
이 지지대 고개를 시작으로 예전 경수로(京水路)를 따라
10여리에는 노송(老松)이 자라고 있다. 정조의 지시로 500그루가
심어졌는데 지금은 130여 그루만 남아 있다. 그 중 비교적 잘
자라고 있는 지구를 노송지대라 하여 보호되고 있다.
정조는 용주사를 크게 다시 짓고 융릉의 원찰로 삼아 아버지의
능을 수호하고 명복을 빌었다. 용주사는 불교가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던 시기에 국가적 관심 속에 세워졌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조선전기에는 왕실의 원찰이 간혹 세워진 예가 있긴 하지만
후기에 와서는 원찰이 세워지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용주사는 왕실의 원찰 답게 다른 절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거대한 화강암을 잘 다듬어
세운 천보루의 기둥이다. 돌로 만든 기둥은 주로 궁궐 건축에
사용되는 것으로 왕실의 후원아래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소맷돌의 장식도 태극무늬와 구름·모란 무늬가
새겨 있어 다른 절과 다르다.
당대에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김홍도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그렸고 김홍도의 감독 아래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제작했다. 또한 정조는 김홍도가
그린 4폭의 병풍을 하사하여 용주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 수원화성의
건립이다. 화성 건립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서울 양반 중심의
붕당정치를 극복하고 재야 선비 백성의 자율성과 정치참여도를
높여 주는 새로운 정치구조 창출의 하나\'라는 견해와 함께
\'급격한 도시적 발전이라는 전면적 사회변동기에 직면해
도시적 발전을 수도권 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왕권 강화와
왕조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해 추진된 국가적 사업\'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한 \'끈질긴 기득세력과 반대파를 몰아 내는 방법으로
그들의 근거지를 뿌리뽑고 약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
이라하며 수원화성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는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한 견해도 있다.
▲ 수원화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힐 만큼
아름답기까지 하다
화성은 단순히 효의 상징물이 아닌 개혁을 위한 새로운 공간이며
정조가 새로운 세력과 함께 개혁을 펼쳐 갈 정치적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화성행궁에는 정조가 앞날을 내다보며 그의
의지를 담은 건물이 있다. 노래당(老來堂)이다. 노래당은
"늙어서 와 살 집"이라는 뜻으로 수원화성에 대한 정조의 속뜻을
가늠할 수 있다. ▲ \'늙어서 와 살 집\'이란 의미의 노래당은
정조의 숨은 뜻이 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개혁의 완성을 꿈꾼 공간으로 남겨 둔 채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정조의 개혁이 완성되기까지 세상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독살에 의한 것이든, 병에 의한 것이든
세상은 정조의 개혁을 받아들여 주질 않았다.
지금은 미완의 개혁을 후세에 남긴 채 정조는 아버지 옆에 누워 있다
건릉 주변에 곧게 자라고 있는 상수리 나무는 그의 개혁의지를
담은 듯 굽지 않고 곧게 뻗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김정봉